선동열 파동부터 얼리드래프트까지… ‘대형 신인’들이 바꾼 KBO 드래프트 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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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는 프로야구가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아마추어 야구와의 균형적인 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다. 그 중심에는 늘 시대를 흔든 대형신인들의 입단 파동이 있었고 그러한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려는 이들과 이를 막으려는 이들의 치열한 신경전이 존재했다. 리그의 지형을 바꾼 신인들을 중심으로 KBO 신인드래프트의 변천사를 짚어봤다.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는 1982년부터 시작됐지만 당시는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선수를 수급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본격적인 드래프트는 1983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초창기 드래프트는 선수에 비해 구단의 권리가 강했는데 그 구도에 처음 균열을 낸 인물이 선동열이었다.
지난 2022년 올스타전을 앞두고 프로야구 레전드 40인에 뽑힌 선동열이 본행사에서 시구를 하고 있다. KIA 타이거즈 제공
선동열은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계약금 규모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 끝에 입단을 포기하고 실업야구 한국화장품과 계약을 맺었다. 그 뒤 선동열은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으로 해태 입단식을 가졌는데 이번엔 한국화장품이 반발하면서 프로 입단 무효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부랴부랴 합의에 나서 선동열을 전반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곡절끝에 선동열은 후반기에 뒤늦게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초특급 신인이었던 선동열이 그해 신인왕에 오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다. 그해 신인왕은 같은 팀의 이순철이 차지했다.
이 때문에 대학 졸업 후 실업야구에 진출한 선수는 실업야구에서 최소 2년을 뛰어야 프로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생겼다. KBO도 지명선수의 계약교섭권 등 신인선수 수급 체계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어쨌건 초창기 신인 드래프트의 핵심은 프랜차이즈를 강화하기 위한 ‘지역연고제’였다. 연고 구단이 해당 지역 출신 유망주를 우선 지명하는 ‘1차지명’과 우선지명에서 제외된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2차지명’으로 진행됐는데 1985년까지는 1차지명이 사실상 무제한이었다. 그러나 특정 지역의 선수 독점, 구단 간 전력불균형 심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1차지명 인원을 1986년 10명, 1990년 2명, 1991년 1명으로 줄였다.
양준혁이 특유의 만세 타법으로 장타를 만들어내고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그 직격탄을 맞은 것이 양준혁이었다. 1992년 삼성 라이온즈는 투수 최대어 김태한을 잡기 위해 한 장뿐인 1차지명권을 행사했다. 야수 최대어 양준혁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다. 이에 양준혁은 입단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했고 1993년 1차지명을 받아 결국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이후 KBO는 고의적인 지명거부를 막기 위해 2차 지명권 유효기간을 3년으로 연장했다.
이승엽이 1997년 정규시즌 MVP로 선정된 뒤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이때까지만 해도 신인드래프트는 대졸 선수 위주로 진행됐다. 그 덕분에 1991년부터 1995년까지는 ‘고졸 연고 자유계약’ 제도를 통해 연고지역 고교 졸업 선수는 특별한 지명 절차 없이 계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김원형(쌍방울), 정민철(빙그레 이글스), 이승엽(삼성) 등 고졸 신인들이 프로에 직행해 성공을 거두자 드래프트 시장의 판도가 흔들렸다. KBO는 더 많은 대졸 선수들이 1차지명을 받을 수 있도록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고졸 우선 지명’ 제도를 한시적으로 도입하기도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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