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백인천, 4할타자에서 비밀요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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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야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원로 야구인 백인천 선생이 별세했다. 야구계에 따르면 백인천은 뇌출혈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중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백인천의 삶은 그를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야구역사의 산증인이자 '풍운아'로 꼽게 만들다. 백인천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2년 중국 장쑤성 우시현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 때 월남했다. 어릴 때부터 탁월한 운동신경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백인천은, 경동중과 경동고를 거치며 야구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동시에 활약했고, 전혀 다른 두 종목에서 모두 아마추어 최고 선수로 꼽혔을만큼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했다.
대어의 탄생
1960년 국내 각종 대회에서 32승 2무로 무패전설을 기록한 경동고의 핵심멤버로 활약하며 백인천은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경동고는 그해 일본야구협회의 초청을 받아 일본 고교팀들과 친선경기를 벌였는데, 당시 한국보다 훨씬 수준이 높던 일본 고교명문 상위권 팀들을 상대로도활약했다. 이때 백인천은 일본야구계에서도 특급 유망주로 주목 받는다.
당시만 해도 해외진출은 상상하기 힘든 시대였고, 한·일 국교정상화도 이뤄지기 전이었다. 극심한 반일감정과 해결하지 못한 병역 문제, 야구협회의 결사 반대까지 겹치면서 백인천의 일본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백인천은 이미 큰 꿈을 품은 상태였다. 국제대회를 마치고 환영행사에서 정부 고위 인사와 만날 기회가 생기자 그는 대뜸 "일본 진출을 도와달라"라고 당돌하게 요청해 결국 정부 측의 허락을 받아냈다.
백인천은 당시 예정돼 있던 고려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팀 농협을 거쳐 1962년 토에이 플라이어즈(현 홋카이도 니혼햄 파이터즈)에 입단하며 일본 진출의 꿈을 이루게 된다. 당시는 아직 한국프로야구리그가 출범하기 한참 전이었다. 그렇게 백인천은 해방 이후 재일한국인을 제외하고 일본 최초의 한국 국적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이후 백인천은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현 세이부 라이온즈), 롯데 오리온즈(현 지바 롯데 마린스), 킨테츠 버팔로즈(현 오릭스 버팔로즈) 등을 거치며 1981년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장수하며 성공적으로 활약했다. 차별 대우와 텃세도 많았지만 특유의 노력과 근성으로 모두 이겨냈다. 입단 당시에는 포수였으나 외야수로 전향했고 기동력과 정교함을 겸비한 전천후 호타준족 선수로 인정받았다.
라이온즈 시절인 1975년에는 타격왕(퍼시픽리그)까지 수상하며 해외 프로리그에서 최초로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백인천은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하여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했다.
중앙정보부 요원

그런데 백인천의 일본 프로야구 시절에는 숨겨진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더 있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백인천의 일본 진출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것'과 '병역 의무를 반드시 이행할 것'을 약속받았다. 백인천은 1971년이 되어 약속대로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귀국했는데, 이 때 예정된 기본 군사훈련 외에 비밀리에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불려가서 국외 파견 정보요원 자격으로 특수훈련까지 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백인천은 공식적으로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프로야구 선수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주일 대사관에 소속된 특수요원으로 활동하며 병역문제를 해결했다. 이 사실은 훗날 일본에도 알려지며 국회가 그의 추방을 요구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주일 대사관 측은 "백인천을 대사관 소속으로 넣은 것은 병역문제에 민감한 한국의 정서를 고려한 결정이었고, 중앙정보부나 스파이 활동은 사실무근"이라고 적극 해명하면서 사태는 유야무야 넘어갔다.
오랜 시간이 흐른 2014년 백인천은 한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중정 요원으로 활동한 것이 맞다"고 인정했다. 또한 자신 외에도 유명 연예인 등 일본에서 정보요원으로 활동한 한국인이 많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본인이 정보요원으로서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유명 프로야구 선수라는 명망과 신뢰성을 활용해 일본 유력인과 접촉하고 그들로부터 얻은 고급 정보를 정보부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40대에 세운 유일무이 기록, 4할 타자
1982년 불혹에 접어든 백인천은 한국프로야구 KBO리그가 출범하자 모국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보내기 위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 나이 41세였던 백인천은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며 리그 최고령 선수이자 창단 초대 감독이 됐다.
은퇴를 앞둔 고령의 나이에도 백인천은 프로 원년 72경기에서 타율 .412(250타수·103안타) OPS 1.237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KBO 리그 역사상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4할 타율' 대기록을 수립했다.
미국에서도 1941년 테드 윌리엄스 이후로는 4할 타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고, 일본에서는 4할타자가 리그 역사상 아예 전무하다. 이로서 백인천은 한미일을 통틀어 현대야구의 마지막 4할타자로 이름을 남겼다. 또한 백인천은 이해 KBO리그 초대 타격왕에 오르며, 일본 시절을 포함하여 '한·일프로야구에서 모두 타격왕을 기록한 최초이자 유일한 선수'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백인천의 4할 타율에 대하여 프로 원년이라 경기수가 적었고, 당시 리그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저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지금같은 기록 관리도 없었고, 감독까지 겸임해야하는 부담 속에서 수립된 백인천의 기록은 충분히 높게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다만 선수생활의 마무리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이듬해인 1983년부터 노쇠화와 개인사 문제가 겹치며 부진에 빠진 백인천은 선수 겸 감독직을 내려놓고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하여 두 시즌을 더 소화했으나 코칭스태프와의 마찰로 1984년에 은퇴한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백인천은 KBO리그 3시즌 통산 116경기 타율 .335(403타수 135안타) 23홈런·91타점·67득점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
명장으로 시작해 금지어로 끝난 지도자 생활

또한 백인천은 선수만이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은퇴 후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던 그가 본격적으로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MBC 청룡의 후신인 LG 트윈스 감독을 맡으면서부터다. 백인천은 그해 정규시즌 1위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 라이온즈를 4연승으로 완파하며 LG를 창단 첫 통합우승으로 이끌고 명장 반열에 오른다.
1995년에는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삼성은 하락세를 겪고있었다. 백인천은 LG 시절과 달리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고 팀을 이끈 것도 두 시즌(5위-4위)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삼성 역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바로 KBO리그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 타자 중 한 명인 이승엽을 발굴해냈고, 젊은 선수를 중심으로 과감한 세대교체를 단행해 이후 '삼성 왕조'의 초석을 닦았다는 것이다.
물론 재임기간에는 노장 선수들과의 마찰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백인천은 뚝심 있는 팀운영으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프로스포츠에서 '리빌딩(재건)'이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한동안 공백기를 거치다 2002년에 롯데 자이언츠 사령탑으로 부임한다. 하지만 LG-삼성 시절과는 정반대로, 롯데 사령탑 시절은 백인천의 야구인생을 통틀어 최대의 흑역사이자 지금까지도 수많은 논란을 초래한 오점으로 남아 있다.
당시 롯데는 '8888577(2001-2007년 롯데 팀순위, 당시 8개구단)'라는 이른바 비밀번호 시대를 거치며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롯데 구단은 LG와 삼성에서 팀을 성공적으로 재건하며 좋은 지도력을 보여줬던 백인천의 역량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정작 백인천이 지휘봉을 잡았던 2시즌(2002-2003) 동안 롯데는 163전·41승·119패 3무, 승률 .256으로 모두 최하위에 그쳤고, 이는 역대 롯데 감독들 중 단연 압도적인 최악의 승률이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단순히 성적을 넘어, 백인천이 당시 감독으로서 저지른 다수의 비상식적인 '기행'이었다. LG-삼성 시절과 달리 현대야구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던 시대에, 선수단과 프런트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강행한 리빌딩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백인천이 직접 지목하여 데려온 외국인 선수들이 줄줄이 수준미달로 조기 퇴출되며 선수를 보는 안목에 의구심을 자아냈다.
특히 훗날 롯데 최고의 레전드가 되지만 당시에는 유망주였던 이대호가 체중이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쪼그려뛰기 같은 비과학적인 훈련을 강요하다가 무릎부상을 초래한 일화는 롯데 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악명이 자자하다. 또한 백인천은 당시 롯데의 에이스였던 손민한이나 이대호의 트레이드를 추진하다가 구단의 극력 저지로 간신히 무산되기도 했다.
심지어 백인천은 프로야구 감독으로서는 사상 초유의 태업 의혹까지 휘말린 인물이다. 백인천의 롯데 시절 대표적인 별명이었던 '백골프'는, 당시 롯데를 전담 취재하던 기자들이 경기나 훈련장에서도 본업인 야구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자신의 취미생활인 골프 타령만 한다는 사실을 참다못해 폭로한 데서 비롯된 유명한 사건이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롯데 구단은 2003년 8월 5일 백인천을 전격 경질했고, 이후 그의 이름은 롯데 팬들에게 한동안 금지어로 전락했다.
당시 백인천이 왜 이렇게까지 상식을 벗어난 기행과 태업을 일삼았는지 명확한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뇌경색으로 인하여 악화된 건강이 노쇠해가면서 정상적인 감독직 수행과 판단력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 구단의 입김이 강하기로 유명한 롯데에서 프런트와 갈등으로 쌓인 불만과, 특유의 고집스럽고 다혈질적인 성격이 충돌하면서 고의적인 태업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한국야구에서 백인천의 커리어가 사실상 완전히 단절되는데도 큰 영향을 미친 치명적인 오판이 되고 말았다. 백인천은 이후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지도자로 두번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김인식, 김응용, 김성근, 이광환 등 1세대 원로들이 2000년대 이후로도 오랫동안 현장에서 지도자와 행정가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후배 야구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백인천은 비교적 빨리 잊혀져갔다. 그만큼 롯데 감독 시절 말년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오랫동안 각인되어버린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2007년 명예직에 가까운 KBO 원로자문위원, 애제자 이승엽이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SBS 채널에서 일본야구 전담 객원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정도가 이후 야구계 관련 공식활동의 전부였다. 이후 그의 인생 말년은 더욱 평탄하지 못했다. 무려 세 차례 뇌졸중을 겪으며 건강이 악화됐고, 사기 피해까지 당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등 고단하고 굴곡진 세월을 보내야했다. 2021년 이후로는 대외활동을 중단하고 두문불출하며 긴 투병 생활을 이어 왔다.
백인천은 항상 '노력자애(努力自愛, 노력하는 일을 사랑해야 성공할수 있다)'라는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 실천했다. 또한 선수들에게는 강한 정신력과 투쟁심을 강조하는 '혼(魂)이 있는 야구'를 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국민타자' 이승엽 전 감독은 스승의 별세 소식을 듣고 SNS를 통하여 "제가 가장 존경하고 감사했던 백인천 감독님께서 이제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마시고 하늘나라에서는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며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평생을 야구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백인천은 이제 모든 영욕을 뒤로 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한국야구의 큰 별이었던 백인천의 별세에 각계에서도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KBO는 백인천 선생이 한국 야구 발전에 헌신한 공로를 기려 이용일 전 총재대행에 이어 두 번째 KBO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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