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노!" 외치고 '눈 찢기'도… 월드컵서 인종차별, 왜 뿌리 뽑지 못하나
작성자 정보
- 뉴스매니아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81 조회
- 목록
본문

12일 멕시코 사포판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1차전 도중 멕시코 축구팬이 한국인 유튜버의 카메라를 향해 양손 검지로 눈을 찢는 시늉을 하고 있다. 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캡처
"치노(Chino)! 치노!"
19일 오전(한국시간) 멕시코 사포판의 과달라하라 스타디움.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2차전 한국 대 멕시코의 경기 도중 관중석에서 흘러나온 소리다. 홈팀 멕시코를 응원하는 현지인이 한국인 관람객 두 명을 향해 외친, 적대감마저 깃든 고함이었다. '치노'는 스페인어로 '중국인'이라는 뜻이지만, 동양인 전체를 싸잡아 비하하는 멸칭으로도 쓰인다. 이 상황을 목격한 유튜버 '영알남'과 출연자는 영상에서 "치노 소리는 너무 많이 들어 귀에 박힐 정도였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국인 관람객에게) 맥주컵을 너무 던지더라. 신발도, 모자도 던지고 난리도 아니었다"고도 했다.
한국인 축구 팬들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튜버 '이노냥'의 피해 사례는 세계적 논란이 됐다. 12일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한국과 체코의 조별리그 A조 1차전을 관람하던 중, 한 멕시코 남성으로부터 '눈 찢기' 제스처로 인종차별을 당했기 때문이다. 양손 검지로 두 눈을 찢어 보이는 이 동작은 대표적인 동양인 비하 제스처다. 현지 언론을 비롯한 외신들의 보도로 신상이 털린 가해 남성은 결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 사과를 해야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불거진 인종차별 논란은 이뿐이 아니다. 15일 미국 텍사스주(州) 휴스턴 스타디움에서 열린 독일과 퀴라소의 조별리그 E조 1차전 때 비디오판독(VAR)을 맡은 호주 출신 숀 에반스 심판은 킥오프 순간, 오른손을 내린 채 뒤집힌 형태의 'OK' 손동작을 취했다가 '백인우월주의'를 드러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해당 제스처에서 곧게 편 세 손가락은 'W(White)'를, 엄지와 검지로 만든 원은 'P(Power)'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제적인 '혐오 신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다만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에반스 심판의 해명에 따라 더 이상 문제가 되진 않았다.

파라과이 축구대표팀의 미겔 알미론이 2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D조 2차전 튀르키예와의 경기 도중 입을 가린 채 상대 선수에게 말한 행위로 레드카드를 받자 얼굴을 감싸고 있다. 샌프란시스코=AFP 연합뉴스
인종차별 일상화… 그래도 최근엔 '무관용'
이 같은 사례들에서 보듯, '지구촌의 축제' 월드컵 현장의 관람 문화는 아직도 차별과 혐오로 물들어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피파)이 인종차별 관련 규정과 처벌을 강화하고 있음에도 '완전한 근절'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월드컵만이 아니다. 해외 프로축구에서 인종차별은 다반사다. 유럽 구단 소속 한국인 선수들은 팀 동료나 상대 선수, 심지어 방송 진행자한테까지 모욕적 발언을 듣곤 한다.
'월드 클래스 공격수' 손흥민(34·LA FC)조차 인종차별에 수없이 노출됐다. 토트넘 시절이던 2024년, 손흥민의 팀 동료였던 우루과이 국적 미드필더 로드리고 벤탕쿠르의 자국 방송 인터뷰 발언이 대표적이다. 벤탕쿠르는 "손흥민 사촌 유니폼을 가져다줘도 모를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다 똑같이 생겼다"는 농담을 던져 공분을 샀다. 황희찬(30·울버햄프턴)도 같은 해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코모1907과의 프리 시즌 연습 경기 중 조롱을 당했다. 상대팀 선수 마르코 쿠르토(현 체세나 FC 소속)가 황희찬을 겨냥, 자신의 동료에게 "그(황희찬)를 무시해. 자기가 재키 챈(성룡)인 줄 안다"고 말한 것이다. 차별인 줄도 모른 채 뱉어 내는 혐오 발언이 일상화돼 있다는 방증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축구계도 최근 들어 인종차별 가해자에겐 관용을 베풀지 않는 분위기라는 점이다. 구단의 사과나 가벼운 벌금형 정도로 넘어갔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출전 금지' 등 중징계도 내려진다. 벤탕쿠르는 당시 손흥민에게 사과했음에도 잉글랜드축구협회(FA)에서 '7경기 출전 정지 및 벌금 10만 파운드(약 2억 원)'의 징계를 받았다. 쿠르토 역시 피파의 '10경기 출전 정지' 징계 조치를 피하지 못했다.
피파가 2024년부터 운영 중인 '인종차별 대응 3단계 프로토콜'도 꽤 강력한 수준이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일단 인종차별 또는 모욕적 행위의 표적이 된 선수는 양팔을 교차해 'X' 표시를 하는 방법으로 주심에게 상황을 직접 알리면 된다. 이때 주심은 3단계 절차에 따라 △경기 중단 △경기 일시 정지 및 가해자(선수 또는 심판) 퇴장 △경기 전면 취소 및 몰수패 등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축구장에서 인종차별은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든 셈이다.

2024년 국제축구연맹(FIFA·피파)이 공개한 '인종차별 대응 3단계 프로토콜'의 새로운 규칙. 선수들이 양팔을 교차해 ‘X’ 표시를 하며 인종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심판에게 알리면, 심판은 3단계 절차에 따라 △경기 중단 △경기 일시 정지 및 가해자(선수 또는 심판) 퇴장 △경기 전면 취소 및 몰수패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피파 공식 홈페이지 캡처
사라지지 않는 차별·혐오… FIFA 규제 장치 '시험대'
그러나 통계 수치는 피파의 노력이 역부족임을 보여 주고 있다. 영국 축구계 반인종차별단체 '킥잇아웃'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4-25 시즌에 접수된 차별 신고는 총 1,398건에 달했다. 단체 설립 이래 역대 최고치였다. 해당 사례는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등 프로 경기 △지역사회 아마추어 축구 경기 △온라인 공간 등에서 수집된 차별 신고 건수를 합한 것으로,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성차별, 성전환자 혐오, 장애인 차별 등도 포함하고 있다.
특히 EPL 내 인종차별 신고는 지난 시즌(223건)보다 10%가량 증가한 245건을 기록했다. 경기장에서 관중이 집단적으로 특정 인종을 비하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함성을 외치는 '인종차별 챈트(구호)'는 무려 6배나 증가하기까지 했다. 경기장 내 차별과 혐오가 줄어들긴커녕 되레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한창 진행 중인 2026년 월드컵은 피파의 인종차별 규제 장치에 대한 평가가 이뤄질 시험대로 꼽힌다. 기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참가국이 늘어난 만큼, 더 많은 나라에서 다양한 민족·인종이 참여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월드컵 개막을 2개월 앞두고 있던 지난 4월, 사무엘 오카포 킥잇아웃 최고경영자(CEO)는 "반(反)차별 프로토콜이 잘 작동하는지, 기관과 플랫폼들이 혐오에 맞설 의지가 있는지, 축구계가 진정으로 포용적 태도를 취할 준비가 돼 있는지 등을 따져보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외 관련, 피파가 디지털 공간에서의 인종차별에도 칼을 빼 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피파는 월드컵 개막일(11일)부터 '소셜미디어 보호 서비스(SMPS)' 인공지능(AI) 모니터링 소프트웨어를 통해 악의적 게시물을 실시간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380만 건 이상의 게시물을 확인해 '유해 표현'으로 분류된 38만8,000건을 삭제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대회 전체 기간 동안의 삭제 건수(28만7,000건)를 이미 넘어섰다.
지난 20일 조별리그 D조 2차전 파라과이 대 튀르키예의 경기에서 파라과이의 에이스 미겔 알미론이 퇴장당한 일도 눈길을 끈다. 주심은 알미론이 입을 가린 채 말한 점을 문제 삼으며 단호하게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선수가 인종차별 발언을 '확인 불가' 상황에서 하는 걸 원천 차단하기 위해 올해 도입한 이른바 '비니시우스 법'에 따른 '1호 퇴장'이었다.

15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스타디움에서 열린 독일과 퀴라소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E조 1차전 킥오프를 앞두고 호주 출신 심판이 오른손을 내린 채 'OK' 손동작을 취하고 있다. 당시 TV 중계 화면에 잡힌 모습이다. '트랜스퍼 뉴스 라이브' 페이스북 계정 캡처
유럽 극우 '반이민 정서', 축구장에도
'축구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다'는 피파 캠페인 문구와 달리, 월드컵 무대에서 약 100년 동안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로운 분석 중 하나는 '다문화·다인종이 한데 모이는 특수성이 역설적으로 인종차별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올해 48개 참가국 대표팀 선수들 가운데 본국이 아니라 해외에서 태어난 선수, 곧 '이민자 선수'의 비율은 24%로 집계됐다. 20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문제는 바로 이 '해외 출생 선수'가 인종차별의 주된 표적이 된다는 점이다. 이들이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인종차별 발생·노출 확률도 증가한다는 걸 뜻한다. 게다가 경기 결과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이민자'가 되기도 하는 게 그들이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는 "대회 중에는 자국 대표팀 내 해외 출생 선수를 응원하면서도, 막상 대회가 끝나면 그들을 배척하는 이율배반적인 (축구팬들의) 모습이 앞으로 더 자주 목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축구는 국가의 정체성과도 강하게 결부돼 왔는데, '세계 축구 중심지'인 유럽이 이주민·난민 증가로 경기 침체와 일자리 부족, 치안 악화 등을 겪는 탓에 축구팬들에게 혐오가 스며들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주민·난민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나 혐오감, 또는 백인우월주의가 동원되는 측면이 있다"며 "(백인들 위주인) 극우 세력이 다른 민족·인종과 연관된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인종·다문화가 보편화한 세계에서 오히려 자기 정체성이나 뿌리를 찾으려 하는 반작용들이 거세게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라고 부연했다.
오랜 기간 고착화한 축구계의 인종차별 문제는 '근절'이 아니라, '관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제언도 나온다. 피파의 여러 규제 장치에도 불구, 이를 우회해 가며 교묘하게 인종차별을 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교수는 "한국은 앞으로 유소년급에서도 다인종·다문화 선수들이 늘어날 텐데, 이때부터 교육 프로그램 등을 체계적으로 실행해 경각심을 키우고 예방책을 세워야 한다"며 "성인 선수가 되면 유럽이나 다른 무대에서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 본인 스스로 대처하는 데에도 도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